세 권의 책에 대해 하나의 포스팅으로 땜방하려니 조금 무안하다.
이제는 좀 덜하긴 하지만 SF팬덤(이라 쓰고 게토라고 읽는)질을 한창 하던 때에, 누군가에게 SF교에 대해 전도질을 할 때면 남자라면 취향에 따라 듀나라든가, 필립 딕이니, 하인라인이니, 젤라즈니니 아니면 보네것이나 더글래스 애덤스까지 상대의 반응을 보며 들이밀었겠지만, 그 상대가 여성이었다면 두말없이 르귄을 권하곤 했다. 그러니까 닥치고 르귄부터.
뭐, 이제는 누군가 SF작가중에 노벨상을 탄다면 르귄... 이라는 칭호자체가 식상해진 마당에 때마침 여든을 바라보는 이 때에까지 노익장을 과시하며 내놓은 서부해안연대기 삼부작.
굳이 장르를 나누자면 에픽판타지 계열에 속하겠지만, 아서 클라크가 말했던 바를 뒤집어 말하자면, '공들인 마법은 과학과 별 다르지 않다'. 언제 젤라즈니나 르귄이 SF와 판타지로 딱 나누어 떨어지던가. 게다가 이번 삼부작은 작가 자신이 성인 대상도 아닌 청소년용 성장소설이라 못박은 차에.
일찌기 프레이저경이 분석해낸, '영웅신화의 패턴'이 대부분 판타지의 원형이자, 한국식으로는 환협지의 기본뼈대이겠지만, 르귄은 이 삼부작을 통해 그러한 영웅신화의 패턴에 대한 안티테제를 설득력있게 그려내고 있다.
화려한 사건이나 멋진 주인공 따위는 나오지 않으며, 그렇다고 테리 프리챗이나 더그 애덤스처럼 풍자적이거나 유희적이지도 않다. 어디까지나 진중하면서도 잔잔하게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것이 역시 르귄답다.
판타지이다 보니 새로운 세계관이나 소위 말하는 '마법'에 해당하는 '능력'-'선물'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런 것들이 이야기의 핵심추력은 아니다. 오히려 맥거핀에 가깝다고나 할까.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들은 전부 잘못된 곳에 잘못된 때에 주어져 오히려 주인공들을 시련에 빠지게 하는 장치로 작동한다. 세 권 모두 해피엔딩이긴 하지만(이 정도를 해피엔딩이라고 불러야 하는지 잠깐 회의가 들긴 하지만) 세 이야기 모두 타자에 대한 승리로서의 해피엔딩이 아니라 '어른'이 되어 가는 소소하면서도 단순한, 그러면서도 무거운 삶의 실존을 묵묵하게 밟아나간다는 내용.
하긴, 르귄의 이러한 '화끈한 맛이 없는' 성장소설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어스시이야기'에서도 바닥에 깔려있던 주제였고 그녀가 내놓았던 동화들도 대부분 비슷한 주제를 다루니까. 더 나아가서는 '헤인시리즈'도 개개인이 아닌 '종족' 혹은 '문명'의 '성인으로의 성장의 고통과 실존성'을 다룬다는 점에서는 일관성있게 상통하는 주제의식이라 할 수 있겠다.
기프트 -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시공사 |
시리즈의 시작. 잘못된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 소년은 어떻게 자신의 운명의 굴레에 맞서 극복해나가는가.
보이스 -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시공사 |
시리즈의 두번째. 억압받는 굴종에서 벗어나게 해준 건 그녀의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의지일 뿐.
파워 -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시공사 |
이러한 구성상, 가능하다면 기프트-보이스-파워 순으로 읽는 것을 추천. 왠지 제시-전개-재현을 따르는 소나타의 형식같다.
유일한 흠이라면 표지의 일러스트. 쓰여진 대로라면 바로 그 '정준호'인듯 하건만 왜인지 르귄의 이미지에는 안어울린다는 느낌인건지.
킬링타임으로는 조금 무겁지만 이틀정도만 곱씹을 만큼 가벼운(?) 소설을 찾는 이들에게 권한다. 뭐, 르귄을 이미 한 권이라도 읽어본 사람들에게야 더 더하고 뺄 평가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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